위봉사 성주 스님
“空 깨닫지 못하면 살아도 허투루 산 것!”

평생의 소망 ‘애국선열 위령각’ 마침내 건립 이뤄
“선열들의 정신 살려 새로운 대한민국 만들자”

위봉사(경북 칠곡군 가산면 송학리)는 1천여 년 전 신라 말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이다. 기원 소망이 잘 이루어지는 사찰로 유명하며 절터 위 장군샘에서 나오는 장군수를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소문나 있다. 창건 당시부터 절에서 모셔온 석조 미륵보살 좌상은 경상북도 문화재(제394호)로 지정됐으며, 유학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면 8부 능선에 위봉사가 최초 창건되었던 터가 있어 지금도 석축과 기와 편들이 남아있다. 학수봉과 봉수봉, 봉학지로 둘러싸여 주변 풍경도 유난히 아름다운 이 사찰을 올해로 출가 75년을 맞은 성주 스님이 지키고 계셨다. 속랍(俗臘) 82세. 그러나 여전히 빛나는 눈을 간직한 노승은, 크고 생기 넘치는 음성으로 한참이나 어린 기자에게 우주의 진리와 인생의 참 가치를 말해 주었다. ‘비어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선열들의 지혜와 나라사랑을 본 받아야 한다’는 이 두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거미와 잠자리
성주 스님과의 만남은 마치 불가의 선문답을 연상시켰다. 불교 교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평소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해보지 않은 탓에 그 질문이 더욱 어렵게만 느껴졌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거미줄에 잠자리가 한 마리 걸려 있더라지요. 그래서 잠자리가 불쌍해 도우려 하니 거미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야! 이놈아 내가 줄 칠 적에 거들어주지도 않은 놈이! 내 밥줄이 걸려있는데 건방지게 무슨 짓이냐? 너 그거 살려주면 잠자리에게는 충신이라도 나에게는 역적이다’ 어떤가요? 잠자리를 생각하면 거미가 죽어야 하고, 거미를 생각하면 잠자리가 죽어야 합니다. 답은 간단해요. 이거 모르면 세상 살 자격이 없어요”
“세상에! 나는 살 자격이 없는 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스님의 질문에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약간의 당혹감이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창피함을 무릅쓰고 스님에게 답을 여쭸다. 그런데 돌아온 답이 기자를 더욱 깊은 미궁에 빠뜨렸다. “그걸 몰라요?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만 자기 마음에서 자기가 칼을 빼야지, 내가 일러주면 그게 남의 칼을 빌린 게 돼 깨우침이 실감나지 않아요. 허허”

좋은 일 했다고 상 탐내면 안 돼
취재를 하다보면 사전에 준비한 질문들이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간혹 발생한다. 성주 스님과의 만남도 그러했다. 바로 앞 맑은 호수를 한 가득 품에 안은 채, 봄날의 산뜻한 바람이 처마 끝 풍경을 “땡∼땡” 호기롭게 울린 이날 위봉사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세속을 초월한 묘한 기류가 가득했던 그날 그 사찰 한 복판에서, 천연덕스럽게 ‘위봉사의 창건 유래’나 ‘성주 스님의 지난 이력’등을 묻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인데다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고민도 필요가 없었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성주 스님이 그 脈(맥)을 매우 잘 이끌어 줬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상을 욕심내서는 안 돼요. 천하가 우러러 볼 대단한 일을 해도 자랑할 것이 못되는 거지요. 옛날에 어느 도승이 길을 가는데 눈밭에 거지 하나가 누워 떨고 있더래요. 평소 보시도 많이 하고 수양도 많이 했던 이 도승은, 저 거지도 부처님 자식이라고 생각해 장삼을 벗어 줬답니다. 그랬더니 그 거지가 ‘아, 이제 뜨듯하니 살겠다!’ 이러더래요. 그 말을 듣고 도승도 기분이 좋아져 ‘아! 내가 참 오늘 큰일을 했다. 부처님 옷(장삼)을 거지에게 입혔으니 이는 부처가 한 일이다’ 라면서 싱긋 웃었답니다. 그러자, 거지가 불현 듯 ‘당신은 왜 웃소?’ 하고 물었어요. 도승은 ‘천하에 중생이 모두 내 몸 한 덩어리인데, 네가 떠는 것이 내가 떠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도 불쌍해내 옷을 입히고 나니 내가 기쁘다’ 했답니다. 그랬더니 거지가 뭐라고 한줄 아세요? ‘야! 이 도둑놈아! 아까 네가 입고 있을 때는 즐거운 마음이 없다가, 나를 입혀놓고 네 기분이 좋다면 네 몸 다르고 내 몸 다를진대, 어찌 천하 중생이 한 몸 덩어리라고 하느냐!’ 이 말에 도승이 깜짝 놀라 그만 절을 했는데, 알고 보니 문수보살이 거지로 化現(화현)했던 거였어요. 허허”

空(공)을 깨달아야 구애받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성주 스님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깨달음인 ‘空 사상’ 그리고 ‘무정설(無情說)에 관계된 비유다. 성주 스님은 “공’(空)을 깨달으면 어떤 것에도 구애될 것이 없고, 구애받지 않는 자는 영생 불사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공’의 이치를 깨달은 자의 육신이 죽으면 한줌 흙으로 돌아갈 뿐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을 깨달은 자는 염라대왕의 명부에서도 이름이 빠진다고 한다.
“부처께서 잔을 하나 만들었어요. 공자도 잔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억만 년 전에 한 도공도 잔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런데 오늘 어리석은 아이 하나가 또 잔을 하나 만들었다고 해 봐요. 형상이 깨지면 뭐가 남죠? 그 아이가 만든 잔의 빈자리나 억 만년 전에 도공이 만든 잔의 빈자리나, 부처가 만든 것이나 공자가 만든 것이나...형상이 깨지면 결국 같아요. 지금의 우리,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 자체는 수억 겁 만 년 전에, 이미 이 세계가 생기기도 전부터 원래 비어있는 것이에요. 바로 그것을 아는 것. 空(공)은 시간의 차이가 없는데, 억만년 전의 공이 곧 오늘의 공이 되고. 둘은 하나이고 변하지 않지요. 아무리 불제자라도 ‘공의 자리’를 깨닫지 못하면, 평생 절밥을 먹어도 결국 ‘밥도둑’에 불과하답니다”

원래 生死는 없는 것
이처럼 ‘空(공) 사상’은 우리가 일상에서 가끔씩 가지는 의문인 ‘남자가 먼저인가? 여자가 먼저인가?’ 혹은 ‘빵이 먼저인가? 국수가 먼저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무엇이 빵이 되고 국수가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누군가 이렇게 물었을 때 우리는 ‘밀’이라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빈자리. 즉 생사 없는 자리를 알아야 해요. 싱겁고 무지한 사람들일수록 ‘나는 생사를 초월했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원래 생사는 없어요. 생명 자체가 이미 비어있는데 어떻게 초월했다고 말하고 또 생사의 자유를 얻는다고 말 할 수 있나요. 말이 안 되지요. 진리의 본체는 움직이지 않아요. 우리 모두가 다 한 덩이에요. 짐승도 사람도, 다 허공에 코를 걸어놓은 채 살아가지 않나요?”
성주 스님은 언젠가 지구가 멸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이 ‘비어있음’ 空(공)이라고 했다. 또 삶과 죽음이 원래 없는 것이라 보면, 살면서 마음 아파할 이유도, 또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나무를 벌리면 틈이 생기지요? 그런데 그 형상은 벌릴 수도 있고 오므릴 수도 있지만, 그 안의 빈자리는 오므려지지도 않고 더 벌어지지도 않아요. 삼라만상이 모두 그렇게 빈자리를 머금고 있기에 두드리면 소리가 나요. 생명이 있는 유정물이든 그렇지 않은 무정물이든, 결국 비어있지 않으면 구부러질 수도 움직일 수도 없어요”
그러니 우리 모두는 공을 깨달아야 한다.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만든 빈 잔이 수 억겁만년 도공이 만든 빈 잔과 같다. 하나로 통일이 되어 있는 것이다.

민족정기에 나라의 흥망성쇠 달려 있어
위봉사에는 현재 새로운 전각 하나가 세워지고 있다. 그런데 이 사당에는 부처님이 아닌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모실 예정이라고 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백범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이 준 열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다. 한편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되면서도 그 이유가 매우 궁금했다. 이 사당에는 성주 스님의 평생의 꿈이 담겨 있다. 스님이 건넨 ‘애국선열 위령각 건립 취지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우리가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누구의 희생입니까? 바로 핍박받는 조국을 구하겠다고 피와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순국선열의 희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주체성을 잃고 물질의 풍요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순국선열 제위와 충혼의 얼을 다시 되새겨 빛나는 조국을 건설해야합니다. 조상을 숭배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인간의 근본 도리이며 윤리 도덕입니다. 눈앞의 이익으로 분쟁과 분열에 물든 우리들은 깊은 반성과 자각을 통해 화합과 단결로 선열들의 얼을 받들어 밝은 미래, 영원한 조국의 번영을 함께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수탈과 폭압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성주 스님은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세계 시민’이란 말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평화의 시대를 맞게 해준 선열들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네가 잘나고 누가 잘나고 그런 조상 자랑 할 필요 없어요. 김 씨 집안은 김구 선생, 안 씨는 안중근 의사, 또 이 씨는 이준 열사. 이렇게 모시면 되요. 그래서 다들 꽃 한 송이 씩 헌화하면 되는 거죠. 우리 국민이라면 종교를 초월해 누구나 한 번씩 찾아 왔으면 해요”

‘잘난 척’과 ‘욕심’ 경계하자
성주 스님의 방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급기야 사찰과 법당을 순례하는 짧은 산책으로 이어졌다. 위봉사의 법당 외벽에는 보는 이의 시선을 끄는 흥미로운 벽화들이 여러 점 있었고, 성주 스님은 그림에 담긴 의미를 하나 씩 설명해주었다. 아니 그것은 설명이라기보다 마치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듣는 옛날이야기를 연상케 했다. 오로지 산사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그럴 때마다 울리는 풍경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나이를 잊은 듯한 老 스님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가에서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다니고, 또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데, 그림을 보면 저 영감이 그 사자와 코끼리를 뺏어 버렸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고 문수의 옷으로 걸레질을 하고, 사해 바다를 술독으로 삼고, 또 별을 엮어 팔에 감고 하늘을 쓰고 있어. 거기다 극락세계 아미산의 연산홍을 입에 물고 있지. 아주 심통이 대단한 사람이야. 잘난 척을 해대는 거지. 그런데 그 바로 앞에서 개미란 놈이 다리를 들고 있어. ‘내 이거나 봐라. 이놈아!’하고 말이야. 허허. 개미 뒷다리의 땀구멍도 시방 세계와 통일이 되어 있다 이런 얘기야. 그러니 지가 좋은 일 했다고 잘난 척 하면 안 돼”
한편, 법당 옆 산신각에도 재미있는 벽화들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내용들이다. 산신령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지나쳐 횡재를 놓친 나무꾼, 평소 공도 들이지 않았으면서 제 몫이 아닌 것을 탐낸 심마니, 공부만 하려다 도리어 돼지처럼 먹는 것에만 마음을 뺐긴 된 수도승 등. 해학적이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교훈이 담겨있다.   

大空(대공)을 깨달아야 부처님 마음
몇 해 전, 성주 스님에 관한 재미있는 사연이 지역 언론(매일신문, www.imail.com)에 소개된 바 있다. 스님의 방 책장에 딱새가 둥지를 트고는 어린 새끼들을 키운 것이다. 2007년 경, 처음 스님 방을 찾은 딱새는 이듬해 5개의 알을 낳았다고 한다. 딱새 부부는 가끔 스님 방문이 닫혀 있으면 창밖에서 노크를 했을 정도로 성주스님과 친구가 되어있었다. 이 사연은 ‘空’ ‘비어있음’에 대한 통찰을 몸소 실천한 성주스님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모든 악기는 공한 성품을 빼면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아요. 참말로 비어있는 자리를 자기 자리로 삼은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이 대공을 깨달으셨어요. 옛날에는 큰절에 대문을 달지 않았답니다. 문을 달면 문패를 달아야 하고 이름도 만들어야하고, 그러다보면 계보를 만드느라 엉망이 되지요. 사실은 종단도 절 이름도 필요 없어요. 세상 모든 이가 부처님 제자인데 구별할 필요가 있나요?”
끝으로, 성주 스님은 세상의 인연, 특히 부모에 대한 미련이 지나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부모님은 이미 흙이 되고 바람이 되어 떠났는데, 자식들만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고 슬퍼한다는 것이다. 왔으니 가야하고, 떠난 사람이라면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 그 역시 ‘공’(空)이라 했다.

취재_장명수, 김성훈 기자